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6·10 민주항쟁’일에 별세

사인은 노환, 향년 97세, DJ의 정신적 동반자
독재정권 탄압에 맞서 민주주의 위해 헌신한 여성운동가
정치권 각계 추모 행렬 이어져

  • 기사입력 2019.06.11 10:05
  • 최종수정 2019.06.11 11:50
  • 기자명 이의정 기자
(사진출처=김대중평화센터)
(사진출처=김대중평화센터)

1987년 독재 군사정권에 맞서 온 국민이 일어나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던 6·10 민주항쟁일에 한국 민주주의 별이 졌다. 이 날의 항쟁은 옥중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던 그의 남편을 사면하게 만든 날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희호 여사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운동가인 이희호 여사가 향년 97세의 나이로 10일 11시 37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여사는 지난 3월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상태가 안 좋아졌고 끝내 숨을 거뒀다.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 이희호)는 이 여사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故 이희호 여사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정치적 동반자,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1922년에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고, 이화여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혈혈단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당시로서는 신여성이었다. 미국 유학 후 초대 대한 YWCA총무 등을 맡으며 여성 인권신장에 앞장섰다. 1962년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고 싶다’는 결심으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여 정치인의 아내로 발을 내딛었다.

결혼 후 이 여사의 삶은 격정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와 구금, 사형선고, 망명, 가택연금으로 이어진 정치적 혹한기와 풍파를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련 끝에 낙도 왔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이뤄진 대통령 당선으로 영부인이 된 이 여사는 청와대의 안주인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여사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대통령 부인으로서 독자적인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이 여사는 총 5차례 해외순방을 했고 특히 역대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2년 5월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하여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밖에 김대중 정부에 여성부를 창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 확대에도 기여했다.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키며 불우이웃돕기 및 기부운동에 매진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김대중 평화센터의 이사장으로서 활동하며 재야의 정치적 조언자 및 협력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여사의 서거 소식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는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1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가족 측에서는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기를 원한다”며 “5당 대표들을 사회장 장례위 고문으로, 현역 의원들은 장례위원으로 모시려 한다”고 밝혔다.

장례를 주관할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장상 전 국무총리와 권노갑 민주평화당 고문이 맡기로 했다. 발인은 14일 오전 6시이며 장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옆이다.

한편, 북유럽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헬싱키에서 10일 이 여사 서거 소식을 접한 후 애도사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입니다.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해 활동하셨고, YWCA 총무로 여성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민주화운동에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여성부 설치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다”고 이 여사를 회고했다.

문 대통령은 “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하며 이 여사의 별세를 애도했다.

환경경찰뉴스 이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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