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사태 '코드블루' : 세상을 놀라게 한 해상사고]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9)

승선자 인원 통보 및 신원 증명 규정이 강화되고 승선권 선내 판매도 금지
승선 인원 통보, 여객선 승선권 구입 시 성명,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신원 정보 반드시 기입해야 돼

  • 기사입력 2020.06.25 22:44
  • 최종수정 2020.09.14 11:25
  • 기자명 고명훈 기자
해군이 선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수색하고 있다. (사진출처=KBS뉴스 갈무리)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했다. 

이 배는 (주)군산서해훼리참고 소속 여객선으로 한국선박기술(코리아 머린 엔지니어링)이 설계하고 군산시 소재 대양조선에서 건조해 1990년 10월에 진수했다.  

이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로 기록되었는데 안전사고 예방 대책을 소홀히 한 탓에 발생했다. 

출항 당시 초당 10m~14m로 부는 북서풍 때문에 높이가 무려 2~3m에 이르는 파도가 치는 상황이었는지라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날씨였다. 게다가 정원 외에 무려 141명이나 초과 승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감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해 페리호가 처음 운항할 당시에는 주말에도 이용객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 위도와 육지간 왕래객이 얼마 없는 탓에 하루에 왕복 1차례 운행해도 적자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위도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운항을 멈출 순 없었고, 결국 농어촌버스처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겨우겨우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부터 위도가 낚시 명소로 인기를 끌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여객선 이용객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주말에는 몇백명씩 찾아오다보니 더이상 왕복 1회운행으론 버틸 수 없었다. 서해 페리호의 정원은 221명이었는데 주말마다 찾아오는 관광객은 이를 압도했기 때문에 계속 초과승선 시킬 수밖에 없었고, 사고 일어나기 몇달 전부터 이곳을 찾아오던 관광객과 위도 주민들은 운항 횟수를 증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보조금 받는 영세업체라며 증편 허가를 거부했다. 여객선 업체는 주말만이라도 증편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했더니 이마저도 거부했다. 업체도 증편하면 운항비가 더 들기 때문에 간절하게 매달리진 않았다. 

결국 운항 횟수는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관광객을 실어나르게 되었고, 이는 곧 대참사를 발생시켰다.

더구나 사고당시 김장철이라 위도 주민들은 액젓을 내다 팔기 위해 9톤의 멸치액젓, 그리고 자갈 7.3톤까지 실었다. 안그래도 정원보다 141명이나 더 탔는데 무거운 액젓까지 실었으니 이정도면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당시 사고 여객선 승객들 가운데는 직장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왕복 1회 운항하는 탓에 그 선박에 무조건 타야하는 상황이었다.

여객선의 구조적 결함도 한몫했다. 모든 선박의 바닷물 배수구 크기가 1.661제곱미터 이상이 돼야 하나 서해훼리호는 0.267제곱미터밖에 안 됐다. 선박복원성 규칙에 따르면 선박안전운항을 위한 만재흘수는 1.912제곱미터가 돼야 하나, 해운항만청은 이를 2.311제곱미터로 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해훼리호는 6.5톤의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함에도 불구하고 40톤을 실을 수 있게 만재흘수선을 지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해 훼리호 사고 직후의 대처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선장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항해사가 당시 휴가중이었던 터라 갑판장이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으며, 안전요원도 고작 2명 뿐이었다.

또한 긴급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명 장비는 제대로 동작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기우뚱거리다가 침몰해서 구명 장비를 꺼낼 틈도 없었다. 몇몇 사람은 침몰할 때 구명 장비가 있는 문 유리를 깨서 이용하여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었다.

또한 사고 직후 위급상황임을 알린 사람도 없었으며 구조 요청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후 먼저 인명구조에 나선 것은 사고지점 부근에 있던 어선들이었다. 

해양경찰, 119 구조대 등은 사고가 발생한지 거의 1시간 만에 도착했다. 결국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김영삼 정부는 이계익 교통부장관과 노태섭 해운항만청장을 경질하고 들끓는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고위 인사들을 위도로 방문시키고 위도의 파격적인 개발 및 유족의 보상을 위해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다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 쇼였다는 것이 드러나 국민의 공분을 샀다. 정부 관계자는 유가족들의 국가배상 요구에 대해 무시했고 위도 개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아 결국 위도는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기고 주민들도 섬을 등지게 했다.

지난 1996년 1월 31일, 서울지법은 서해훼리호 참사 희생자 10명의 유가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인당 2~4억원씩 총 24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도록 판결을 내려 유가족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더구나 이 사건은 언론에게도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해당 사고에 대한 기자들의 많은 오보가 국민적 질타를 맞기도 했다. 도주했다고 보도된 선장은 사고 발생 5일 후에 무선통신실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날 선장과 함께 도피 의혹을 받고 있던 갑판장과 기관장 역시 사망이 확인됐다. 이에 유가족들에겐 지울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이 서해 페리호 오보 사건은 언론계의 대형 오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박 침몰 사고의 경우 시신 수습이 전부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은 의외로 사망자 전원의 시신을 수습했다. 승선객들이 탈출할 틈도 없이 배가 뒤집혀 전원 배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경 잠수부의 공로도 컸다. 그리고 이 사고의 여파로 이 항로의 여객선 운항횟수가 늘었다. 

사고 당시 정확한 승선 인원 및 승선자 신원 파악에 어려움을 겪어서 사고 이후 그동안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던 승선자 인원 통보 및 신원 증명 규정이 강화됐으며 승선권 선내 판매도 금지됐다. 또한 모든 여객선은 운항 거리를 불문하고 출항 직전에 승선 인원을 통보하게 됐다. 여객선 승선권을 구입할 때 성명,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신원 정보를 반드시 기입해야 하는 것도 이 사고를 계기로 이루어진 조치 이다.

환경경찰뉴스 고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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