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사태 '코드블루' : 세상을 놀라게 한 해상사고] 세월호 참사의 40년전 데자뷔, 통영 예인정 침몰 사고 (3)

인재로 죽어간 해군 훈련병들 진실 아직도 못 밝혀...쉬쉬하다 20년 지나서야 위령제 열려

  • 기사입력 2020.05.31 21:40
  • 최종수정 2020.09.14 15:50
  • 기자명 고명훈 기자
(사진출처=동아일보)

2014년 세월호가 바다에서 가라앉는 걸 지켜봐야 했듯이 40년전에도 같은 상황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1974년 해군 신병 159명이 바다 속으로 사라진 통인 예인정(YTL정)의 비극이다. 이 사고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 군함에서 일어난 최대 해난 사고로 기네스북까지 오른 수치스런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경상남도 통영(당시 충무)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항내 YTL정이 침몰해 해군과 해양경찰 훈련병 159명이 숨졌다.  YTL정이란 대형 선박의 출입항을 도와주거나 바지선등을 예인 해주는 배를 가리킨다. 보조선이기 때문에 대량인원이 승선하기 어렵다.

이날 사고는 해군신병 159기와 해경 11기 훈련병 316명이 해군 신병 훈련의 8주차 훈련일정으로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가기 위해 YTL을 타고 모함인 '북한함'으로 이동하던 도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와 돌풍으로 전복해, 침몰하면서 벌어졌다.

사고 당일 여느 2월 말 답지 않게 강추위가 엄습한 날인데다 오전 10시부터는 충무 앞바다에 폭풍주의보가 내려졌으며 으슬으슬 비까지 내려 체감온도는 거의 영하 10도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명이 넘는 신병들은 협소한 YTL을 타고 충렬사 참배를 갔다. YTL의 정원은 150명으로 정원의 2배가 넘는 사람이 승선한 것이다.

사고 당시 순직한 정장의 조함 미숙도 사고를 일으키는데 한 몫했으며 더군다나 훈련병들의 목이 길고 무거운 전투화는 헤엄치는데 악조건을 만드는 주범이 됐다.

이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에서 일어난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와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비슷한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이런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해군이 공식적인 위령제를 올린 건 사고 후 24년이 지난 1998년의 일이었다. 그동안 YTL은 철저히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금기시 됐다. 그도 그럴것이 군사정권 시대였으므로 사고는 은폐됐다.

사고 당시 주변에 있던 매일호 어부들이 갑판에 있던 10m 길이 나무발판을 바다에 던졌고 목청껏 “헤엄쳐라, 발판을 잡아라.”라고 외쳤다. 일부 선원은 이미 실신해 둥둥 떠 있는 수병들을 갈고리로 찍어 건져냈다. 허우적대는 군인은 많은데 그들이 잡고 버틸 게 없자 기관실 문짝도 뜯어내 바다에 던졌다. 나중에는 배의 로프도 풀어 던졌는데 한 훈련병은 팔로 잡을 힘이 없었는지 이빨로 악물어 구조되기도 했다. 배에 끌어올려진 다음에 보니 앞니가 세 개나 나갔지만 수병은 덜덜 떨기만 할 뿐 이빨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매일호 근처의 급유선 한성호, 잠수기 어선 2척도 현장에 도착해 훈련병들을 구조했다. 이렇게 민간 선박이 구조한 인원은 50명을 넘었고 뒤늦게 도착한 해경 경비정도 8명을 구조했다.

그런데 이렇게 필사적으로 민간어선들이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모함 북한함에선 보유하고 있던 구명보트 두 척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후에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에 따르면 당시 북한함에는 긴급 구난보트 2정이 있었지만 1정은 장교들이 식사를 하러 충무시내로 타고 나갔고 다른 1정은 고장이 나 사고해역에 투입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명보트의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뱃사람들은 “어떻게 이 작은 배에 300명이 탔단 말인가” 고개를 저었지만 신병교육단이 요청한 ‘선박 2척 이상 지원’을 누가 무엇 때문에 거부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 직후 당시 정부는 해군참모총장 김규섭 제독과 참모차장을 경질하고 진해 해군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을 직위 해제하는 한편 훈련대대장 등 인솔 책임자 3명을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하지만 당시 구속된 교육단장이나 신병훈련소장 등 핵심지휘부는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났고 훈련대장(중령)이하 중대장, 소대장, 교관, 조교 등 인솔책임자 역시 복직해 만기전역했다.

결과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 중 실제로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젊은 수병 159명만 바다에서 죽어간 것이다. 심지어 정장은 발견됐을 당시 키를 잡은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국방부와 해군은 과다인원승선·태풍주의보 발령시 훈련강행·조타사의 급회전 등 과실 부분은 숨기고 서둘러 유족들을 회유해 국립묘지 안장과 약간의 군사원호를 지급하는 조건에서 마무리됐다.

이에 30년간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침묵 속에 자체적인 모임을 통한 위령제를 지내야 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서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위령제를 지낼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특히 한국 해군은 함정에서의 전투화 착용을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 금하고 있으며 훈련병 양성과정에서 충렬사 참배는 폐지됐다. 

현재도 통영 해양경찰서는 매년 이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이 곳에 부임하는 해경 직원 또는 해군 장병은 반드시 해경-해군 합동위령탑을 방문하여 헌화하고 참배하고 있다.

환경경찰뉴스 고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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