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일대기] 다산다난했던 ‘삼성 회장’의 인생, 어떻게 피고 졌나

밀수사건 연루 형 대신 회장 취임해 ‘삼성신경영’ 선언
21세기 시작과 동시 IT산업 뛰어들며 글로벌 탑 기업 만들어
정경유착·비리 의혹 등 사회적 지탄 받기도

  • 기사입력 2020.10.26 18:43
  • 기자명 고명훈 기자
(사진=뉴욕타임즈 갈무리)
(사진=뉴욕타임즈 갈무리)

“아버지가 국수 무역 사업을 토대로 시작한 삼성그룹을 한국에서 가장 큰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을 로이터 통신은 이와 같이 전했다. 향년 78세. 이 회장은 2014년 5월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지 6년 5개월만에 무거운 눈을 감았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처럼 삼성은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라는 이름으로 만든 작은 국수공장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336억 달러(한화 약 42조 6000억 원)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내뿜는 세계 톱 기업이 됐다.

3남 5녀 중 7째였던 이건희 회장이 형들을 제치고 그룹 경영권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때문이었다. 59톤의 사카린 원료가 밀수품으로 적발된 대형 밀수 사건이었는데 여기에 형 이맹희, 이창희 씨가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은퇴한 뒤 총수 대행이었던 이맹희 씨는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1987년 회장의 자리에 오른 이 회장은 취임 5년 차에 ‘삼성신경영’을 선언하고 자신의 삼성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경영 전 부문에 대대적인 혁신을 꾀하며 인사차별을 타파했다. 사회공헌활동, 국제올림픽위원 선정 등 기존에 무심했던 다양한 분야에도 참여하며 삼성이라는 이름을 글로벌 시장에 노출시켰다.

2000년대 들어서며 이 회장은 디지털 경영을 선언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시스코 등 대표 IT 기업들의 기세가 치솟고 애플이 아이팟을 출시하는 등 미국 IT 산업의 변화를 감지한 이 회장은 디지털 사업 일류화를 목표로 삼고 각종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반도체-휴대전화-TV-디스플레이’로 이어지는 ‘삼성전자 황금기’를 맞게 됐다.

삼성전자의 역시 2013년 1월 4일 사상 최고가인 154만 8000원을 기록하며 본격 디지털계 ‘삼성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조금 늦게 시작한 스마트폰 갤럭시S 역시 최고를 달성했다. 2010년 5월 첫 출시 이후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수천만대의 매출량을 찍으며 대성공을 거둬냈다.

물론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정경유착과 비리 의혹은 이 회장이 운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꼬리를 물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서 100억 원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를 받아 징역 살이를 받았다. 당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개천절 특사로 사면됐다.

2005년에는 소위 ‘삼성X파일’ 사건이 터져 곤혹을 겪었다. 삼성 임원진이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제공을 논의한 것이 녹음파일 형태로 폭로된 사건이었다. 이 회장은 서면조사 후 무혐의처분을 받았지만, 후에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을 폭로하면서 2009년까지 네 차례의 재판을 거쳐야만 했다.

이 회장은 삼성SDS에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 관련 227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았다.이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의 처분을 받고 2009년 12월 31일 다시 특별사면됐다.

환경경찰뉴스 고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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